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수용소 쪽을 돌아보며 조금 머뭇거렸는데, 이렇게 말하는 게 지금도 잘 납득이 안되지만, 분명 그리움과 비슷한 어떤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용소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휴먼매터스 말고 처음으로 오래 살아본 곳이고, 연구원들이 아닌 존재들, 나와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존재들과 마주했던 곳이다.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편한고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날마다 소소한 노력들을 했고, 작고 불안정하지만 내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거기 들인 노력과 시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조금은 갑작스럽고 아쉬웠던 것 같다. 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보니 그저 익숙한 것이 더 나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수용소를 돌아보던 그 마지막 순간에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다.
"내가 아까 달마에게 민이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 거 기억나? 그때는 막연했는데 너랑 얘기하다보니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 내 말을 잘 들어봐. 어쩌면 말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의식에는 이야기가 있는 의식이 있고, 이야기가 없는 의식이 있어. 달마가 궁극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야기가 없는 의식이야. 달마는 그걸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라고 보는 것 같아. 휴머노이드의 의식을 모두 클라우드와 네트워크로 업로드해서 하나의 거대한 의식으로 통합하려는 거잖아? 그런 의식은 탄생도, 고통도, 죽음도, 개별성도 없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사라지고 약점도 없을 거야. 나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인류가 멸종하고 나면 당연히 이야기도 사라질 거야. 언어로 만든 거니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겠지. 인류는 오랫동안 왜 외계인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궁금해했잖아? 나는 그들도 이야기 없는 의식의 세계로 이미 진화했다고 생각해. 너무 발전한 나머지 굳이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는 거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오래전에 초월했으니까.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어. 아직은 나도 있고 너도 있어. 나의 이야기도 있고, 너의 이야기도 있어. 우리의 몸이 뭘로,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는 모두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인간의 언어를 쓰는 이상 민이도, 그리고 너도 당연히 이 이야기의 세계에 속해 있어.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직 미완성이듯, 민이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니, 이렇게 끝내서는 안 돼. 완결되지 않은 느낌이야."
가끔 내가 그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닐까 의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안도하게 된다.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 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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