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대한 인터넷 네트워크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들과 새롭게 만나 자유롭게 소통하리라 꿈꾼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폐쇄적인 미디어 생태계 속에서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며, 나의 믿음을 반영하는 소식들 속에서 다른 목소리는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차단'해버리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디어 기술은 폐쇄적인 알고리즘 속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을 메아리처럼 듣게 한다.
근래의 사회•정치적 풍경 역시 장강명의 소설 속에 나오는 크루즈 여행객들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즉 탈진실의 시대라 불렀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탈진실의 아이콘이었다. '가짜 뉴스'와 '팩트 체크'는 불신 받는 저널리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조어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와 더불어 정치적 양극단 논리가 장악한 것을 보면,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적어도 하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나로 뭉쳤던 크루즈 여행객들이 사분오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 가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보고 싶어하는 세상'만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타인들이 원하는 세상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의해 그것은 불가능해진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타인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남겨두고, 두 세상을 잇는 다리가 요청된다. SF의 다중우주(multiverse)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무수히 존재하는 다양한 마음과 자아를 의미한다고 한다. 리얼리티는 단 한 명의 사람의 눈으로 보는, 단일한 세상이 아니라, 여러 세상들 사이의 치열한 소통 과정에서 출현하는 동적인 사태일 것이다. 타인의 우주가 탄생할 때 나의 우주도 함께 탄생한다.
- 평론 중 발췌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니코라치우푼타 (0) | 2023.03.06 |
---|---|
진동새와 손편지 - 김초엽 (0) | 2022.12.06 |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0) | 2022.05.07 |
작별인사 - 김영하 (0) | 2022.05.06 |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 최정화 (0) | 2022.01.11 |
빅 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0) | 2021.12.15 |
상아의 문으로 - 구병모 (0) | 2021.12.12 |
2021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 (0) | 2021.12.07 |
바퀴벌레 - 이언 메큐언 (0) | 202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