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빅 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by 충청도 자손박 2021. 12. 15.


어느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챈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전 펄프잡지에 작품을 발표할 때 이런 문장을 썼다네. '그가 차에서 내려 햇볕 따가운 보도를 지난 후 출입구 차양 밑으로 들어서자 물처럼 시원한 그늘이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런데 잡지사에서 이 단편을 실으면서 그 문장을 지워버렸어. 독자들은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액션을 원한다는 이유였지. 나는 그 판단이 틀렸음을 밝히고 싶었네. 독자들은 스스로 액션만 좋아한다고 착각할 따름이라고 믿었거든.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독자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저런 대화와 묘사를 통하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닐까.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에 남아 거듭거듭 생각나는 것은, 예컨데 어떤 남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그가 반질반질한 책상에서 종이클립 한 개를 집으려고 애쓰는 장면일지도 몰라. 클립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고, 그래서 남자의 얼굴에는 골똘히 집중한 표정이 떠오르고, 입이 반쯤 벌어져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 듯하고, 이때 그의 마음속에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야. 저승사자가 문을 두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는 그 망할놈의 클립 하나가 더 중요하니까."(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