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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혹은 애슐리 - 김성중

by 충청도 자손박 2020. 6. 29.
에디 혹은 애슐리
국내도서
저자 : 김성중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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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 종이책

국경시장 이후 정말 오랜만에 아주 좋은 작품

레오니

에디 혹은 애슐리
해마와 편도체
정상인
나무추격자 돈 사파테로의 모험
배꼽 입술, 무는 이빨
상속
마젤

왜 사람은 불행에 붙들리는가? 납득할 수 없는 불행에 붙들린 사람들을 볼 때 흔히들 “왜 저러고 살아?” 하며 고개를 젓는다. 정말 왜, 그렇게 사는가? 모든 것을 끝장낼 듯 살기등등한 아버지가 자주 입에 올린 말은 "버려! 내다 버려!" 였다. 장난감이 상자 밖으로 나와 있으면 전부 버리라고 소리쳤고, 책상이 어질러져 있으면, 책들을 갖다 버리라고 했다. 겁먹은 내가 울음을 터뜨리면 애새끼도 내다 버리라고 고함을 지르다 손찌검이 시작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티끌 하나 버린 것이 없다. 쇼핑광인 어머니도, 열등종자인 아들도, 분통을 터뜨리며 뒷감당을 하고 건사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제발 버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면에서는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폭발할 때마다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이놈의 집구석. 떠나고 말 거야”라고 읊어 댔다. 정작 이 말을 실행에 옮긴 것은 단 사흘뿐이었다. 돌아온 엄마는 아빠 몰래 대출을 받을지언정 두번 다시 집을 나가지 않았다. 리모컨을 성물처럼 손에 쥐고 홈쇼핑 채널을 경건하게 시청(경배) 할 뿐이다. 왜 같은 지옥에 한결같이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빈말은 아닐 거다.”
편도체는 버블티를 쭉 빨아 마셨다. 코코아맛 버블티의 두꺼운 빨대가 그의 입에 꽂혀 있는 품새가 영 어색해 보였다. 우리는 아디다스 저지를 입고 방금 이 옷을 산 롯데 아웃렛 파주점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다. 편도체의 벤츠는 야외 주차장에 세워두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엔 어울리지 않지만 평일이어서 그런가 아웃렛 외부는 햇볕이 내리쬐는 조용한 공원 같기도 하다. '파주점 그랜드 페스타! 다양한 행사와 추가 할인! 아이다스 70% 세일!' 이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이 휘날리고 있지만 저 소리 없는 아우성은 이미 3만 9천원씩 주고 사 입은 네이비색 저지로 저지되었다.
옷이 마음에 드니 쇼핑에 성취감이 든다. 돈을 제대로 써서 기분이 좋다는 만족감, 자본주의적 시민의 정체감을 확인하는 순간이 라고 할까. 같은 컬러를 입은 덕에 그와 나는 조손 같아 보인다. 새 옷이 주는 물성(영성)으로 인해 내 생각이 흐트러지는 동안에도 편도체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 네 부모들은 진심을 말한 거야. 배우자에 대해 끝없이 불평 하면서도 끝내 헤어지지 않는 기혼자들은 사실 '불평하는 그 상태’ 가 좋은 거란다. 이것이 결혼의 무시무시한 비밀이지. 가정을 이뤘고 배우자는 마뜩잖고 그래서 욕하고 감정풀이할 상대는 있는 상태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욕할 대상이 옆에 있기를 원한단다. 그러지 않으면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건 싫거든.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영구히 트집 잡을 대상이 생기는 것 아니냐.
결과적으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게 아니라 불평하게 될 사람과 하는 거야. 네 아버지는 네 어머니가 너무 만족스러울 것이다. 큰소리치기 좋아하고 주기적으로 분노를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에게 딱 맞는 상대 아니냐? 네 어머니도 불쌍할 것 없다. 아비의 성정을 알았으면 널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지. 결국 네 어미는 너보다 네 아버지를 선택한 거야. 그들은 자기가 선택한 배역을 아주 잘해내고 있다."

(......)

“우리 어머니는 성녀였다. 성녀는 고난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핍박을 필요로 한단다. 달리 보자면 자신의 성스러움을 위해 주변을 비틀리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지.
어머니는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고 생계를 책임지면서 오년이나 이어진 아버지의 병수발도 맡아야 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동안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지. 이렇게 절대적이고 순종적인 '선함' '화 한번 내지 않고 모든 것을 감당하는 존재'는 '악함' '화만 내고 모든 것을 떠넘기는 존재'를 불러들이는 법이다. 네 부모가 딱 맞는 패를 이뤘듯, 우리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게 인간관계의 속성이지. 책임은 무책임과 짝을 이루고, 선함은 악함과 짝을 이루고......."


"고통은 오직 겪은 자들만이 그 언저리라도 떠올릴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다 저마다의 고통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에게 신비로운 존재인지도 모르지."

- 해마와 편도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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