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by 충청도 자손박 2016. 1. 16.
애프터 다크
국내도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권영주역
출판 : 도서출판비채 2015.08.25
상세보기


장편소설, 종이책


도시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되어 각각 주인공들의 새벽을 '보는'.

몽환적인 장치들. 텔레비전이 비추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에리. 본질은 떠났지만 거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피상들...

희곡 같은 문체. 마음 묵직해지는 진한 연극 한 편 본 느낌.

한.자. 한.자. 꼭꼭 씹어 읽게 했던.


숨막히는 집에서 나와 책을 읽던 마리.

두 달째 방안에서 잠만 자는 마리의 언니이자 잡지모델인 에리.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 다카하시. 책을 읽던 마리를 발견하고...

모텔에서 창녀를 흠씬 두들겨 패고, 창녀의 옷과 소지품을 전리품처럼 싸가지고 회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에 집중하는 사이코패스 다카하시.


에리가 자고 있는 방에 난데없이 켜지는 텔레비전. 

텔레비전이 비추는 '어떤 공간'(다카하시의 사무실과 비슷한). 그 곳엔 불투명한 가면을 쓴 남자가 나무 의자에 앉아 미동 없이 에리의 침대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다카하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에리는 텔레비전의 그 곳으로 '이동'하게 되고, 잠에서 깨 극도의 불안을 느끼다. 다시 잠이 든다. 새벽 5시 즈음 에리는 어느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고, 그 옆에는 밤 새워 거리를 부유하던 마리가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편안한 표정으로 에리를 껴안고 잠들어 있다. 


다카하시의 '고독'이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에 '고독'한 에리가 잠시 다녀 온 것일 뿐. 현실 어디에서도 다카하시와 에리의 접점은 찾아볼 수 없다.

각자가 가진 '고독'의 내용이 다르듯 그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고독'을 달랜다.



"하지만...... 그래, 너희 언니랑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말이지, 점점 묘한 기분이 들어. 처음엔 눈치채지 못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절절히 느껴지거든. 뭐랄까, 내가 거기 포함되지 않는다는 느낌인데, 아사이 에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와 동시에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

(...)

"요는 말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사이 에리의 의식에 전달 되지 않는 거야. 나랑 아사이 에리 사이엔 투명한 스펀지 지층 같은 게 가로막고 있어서, 내가 하는 말은 그걸 통과하면서 양분을 대부분 빼앗겨. 아사이 에리는 진짜 의미에선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거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걸 알게 돼. 그럼 이번엔 저쪽에서 하는 말도 이쪽에 잘 전달되지 않게 되거든. 그게 참 묘한 느낌인 거야."


(...)"전 야무지지 않아요. 어렸을 때 자기자신에 대해서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주뼛주뼛 남 눈치만 보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애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왕따의 표적이 되기 쉬웠던 거예요. 그런 때 느낌이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어요. 꿈도 자주 꾸고요."

"그렇지만 시간을 들여서 노력해서 그런 걸 조금씩 극복해온 거잖아?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을."

"조금씩. 네, 조금씩 그런 타입이에요. 노력하는 사람."

"혼자서 꾸준히 노력하는. 숲속의 대장장이 아저씨처럼?"

"네."

"그게 가능하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노력하는 게요?"

"노력할 수 있다는 게."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가끔 좀 어둡다는 말을 들을 땐 있어."

"있지, 우리 인생은 밝다, 어둡다로 단순하게 나뉘는 게 아니야, 그 사이에 음영이란 중간지대가 있다고, 음영의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게 건전한 지성이야. 그리고 건전한 지성을 획득하려면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넌 별로 어두운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창밖은 빠른 속도로 환해지고 있다. 창에 내린 블라인드 틈으로 선명한 빛줄기가 방 안에 비쳐든다. 낡은 시간성이 효력을 잃고 등뒤로 지나가버리려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아직 낡은 말을 어물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태양의 빛 속에서, 말의 의미가 급속하게 이행되어 갱신되려 하고 있다. 새로운 의미의 대다수가 당일 저물녘까지만 지속될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걸어나가게 된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민의 교양 - 채사장  (0) 2016.01.27
엄마들 - 마영신  (0) 2016.01.27
뤼미에르 피플 - 장강명  (0) 2016.01.18
영이 - 김사과  (0) 2016.01.18
열광금지, 에바로드 - 장강명  (0) 2016.01.14
철수 - 배수아  (0) 2016.01.12
얼음의 책 - 한유주  (0) 2016.01.12
하루 - 박성원  (0) 2016.01.12
그 여자의 침대 - 박현욱  (0) 2016.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