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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홍성수

by 충청도 자손박 2018. 5. 28.
말이 칼이 될 때
국내도서
저자 : 홍성수
출판 : 어크로스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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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종이책

편견 > 혐오표현 > 차별 > 증오범죄
편견, 혐오표현, 간접차별까지는 교육, 홍보, 정책, 지원, 연구를.
직접차별과 증오범죄는 형사처벌을
골자로 하는 투트랙
혐오방지 프로세스 

부정적 발언 > 소수자에 대한 '기피 > 고용, 학교 등에서의 실제 '차별' > 소수자에 대한 '물리적 공격' > 제노사이드
- 올포트 척도(Allport's Scale) -

범주화, 상징화,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 준비, 절멸, 부인
- 제노사이드 8단계론 -


< 혐오의 피라미드 >

형사범죄화가 반드시 모든 혐오표현을 남김없이 적발하고 처벌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형사범죄화의 '상징적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혐오표현에 대한 금지, 처벌이 한편으로는 국가가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있다는 신호를 소수자들에게 보냄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시민사회를 향애 혐오표현을 관용하지 않는다는 도덕적 정체성과 사회적 가치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혐오표현금지법은 '공적 선언'으로서 '상징적 가치'를 갖는다. 심리학자 올포트는 이와 관련하여 법이 사람들의 편견을 직접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공식화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함으로써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법이 극단적인 편견을 가진 선동가들의 행동까지 막을 수는 없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충분한 행위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혐오표현 규제 구상과 필요한 법적 조치 >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공인의 발언은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게 된다"

"동성애를 혐오한다"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자'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세금 폭탄이나 일자리 문제가 개입되면 최소한의 윤리적인 자기 검증을 중단하게 된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일수록 엉뚱하게도 만만한 상대에게 손쉬운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혐오의 확산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자 올포트는 다음과 같은 사회에 차별과 혐오를 낳는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회구조에 이질적 요소가 많고, 사회 이동성이 있고, 급격한 사회 변화가 있고, 의사소통과 지식의 전달이 막혀 있고, 소수자 집단의 규모가 늘어나고 있고, 경쟁과 갈등이 있고, 착취로 이익을 얻고 있고, 공격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억제되지 않고, 민족중심주의의 전통이 있고, 동화주의나 문화다양성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가 그것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상황을 정교하게 분석할 여력은 없지만, 올포트가 제시하는 상황적 요소 중 한국에 해당하는 것이 적지 않아 보인다.


[ 페미니즘 언어에 반대한다, 무기명 ]
저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앞의 두 문장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인종이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핍박받은 역사가 있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를 유색인종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어에는 사태를 규정하고 개념을 정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사물의 본질마저 뒤바꿀 만큼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스스로를 여성주의자feminist로 칭하기를 거부합니다. 이 용어가 우리의 처한 현실과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근래의 인터넷 문화와 방송, 학내 대자보 등에서,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 특징적인 언어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도 잠재적 가해자, 시선강탈, 강간문화, 여성혐오 따위의 단어는 자주 쓰이는 듯합니다.

페미니스트 여러분은 아마도 의도의 절박함만큼이나 여러분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강한 언어로 말해지는 것들은 더 많은 시선을 끌게 마련입니다. 최근의 남녀갈등 논쟁이 점점 과격해지며 첨예해지는 것은 이런 경향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봅니다.

저는 학대받고 폭력을 당한 모든 여성들에 대한 연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의욕에 찬 과격한 언어가 불러올 결과를 걱정합니다. 여러분은 시선강간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욕망에 찬 시선에서 느끼는 불쾌함이 강간과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강강은 단순히 불쾌한 일로 치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강간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이라 믿는다면, 강간의 피해자를 진실로 연민한다면, 강간이 아닌 것을 강간으로 칭하기를 멈추어 주기 바랍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 시선살인이 아니듯, 시선강간은 불쾌한 시선일 뿐입니다. 자극적인 언어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진실로 끔찍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 것이며, 건전한 상식과 감수성을 지닌 여러분의 잠재적 지지자들을 떠나가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성이 여성을 혐오한다고 생각합니까? 역사를 통해 남성이 여성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학대하였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 악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강간을 당하거나 사회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거나 여자다움을 강요받는 여성들이 있다면, 한편에는 의무에 시달리고 경쟁 끝에 쓰러지며 남자다움을 강요받는 남성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또는 계집애 같다는 이유로, 멸시받고 린치를 당하고 사회적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까?

여러분은 남성이 여성에게 사슬을 채우고 그 위에서 마땅히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 과실을 홀로 만끽하였다고 믿습니까?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성이 며느리로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시어머니가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이라 답변하겠습니까? 고통 받는 남녀 모두는 구조의 희생자입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슬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모두를 옭아맨 것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짓밟으며 즐거워하고 있으리라는 피해의식을 떨쳐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 아래서 바꿀 것은 바꿔나갑시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치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회복합시다. 가해자가 아닌 이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일을 그만둡시다. ‘혐오를 멈추라’라고 말하는 대신 ‘서로 사랑하자’고 말합시다. 제가 여러분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