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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

호킹지수(Hawking Index)

by 충청도 자손박 2018. 4. 4.
‘호킹지수(Hawking Index)’를 아는지요.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이름을 딴 지수이니, 우주, 블랙홀, 호킹이 주장해온 외계 존재 가능성과 관련된 지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조던 엘렌버그 미국 위스콘신대 수학과 교수가 재미로 만든 ‘읽지 않는 책 지수(Unread Book Index)’입니다. 아마존의 ‘인기 하이라이트(Popular Highlight)’기능을 이용해 독자들이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로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정확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고 그저 재미로 만든 것인데 ‘현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호킹지수로 부르는 것은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전 세계에서 1000만 부 가까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지만 끝까지 읽기 어려운 책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렌버그 교수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글을 통해 “야심만만하게 의욕에 넘쳐 6월 1일 읽기 시작했지만 9월이 다 돼가도록 북마크가 제1장의 처음 혹은 중간에 머물러 있을” 책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올여름 추천을 많이 받는 베스트셀러와 고전들을 상대로 HI를 계산했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책이나 국내에선 인지도가 낮은 책들을 빼고, 가장 눈길을 끄는 결과는 세계적 신드롬의 주인공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론’입니다. 이는 HI 2.4%로 호킹의 ‘시간의 역사’(6.6%)를 제치고 가장 ‘읽지 않는 책’으로 나타났습니다. 엘렌버그 교수는 이제 호킹지수를 피케티지수로 바꿔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와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해부한 ‘21세기 자본론’은 장장 700페이지에 달하는 데다 결코 쉬운 책이 아닙니다. 비슷한 예로 지난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내에서 돌풍을 일으킬 당시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HI는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고, 지금 읽지 않았다고 영원히 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책장에 꽂아두고 자신의 관심이 새롭게 일어날 때 다시 꺼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야금야금 몇 달에 걸쳐 읽기도 합니다. 게다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책장을 넘겨 작가의 프로필을 보고 목차를 훑고, 책의 첫 장에서 인생의 통찰을 배웠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은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달리 생각하면 이 책을 꼭 읽겠다며 야심차게 책을 샀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그 책의 자장 안에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읽어보겠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HI는 읽지 않는 책 지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펼치는 책의 지수가 아닐까 합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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