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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

by 충청도 자손박 2016. 10. 18.

어느 쓸쓸하고 깊은 밤, 나는 힘없이 지쳐 있었다.
지금은 잊힌 진기한 옛이야기 책을 떠올리다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똑똑,
내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중얼거렸다.
“누가 내 방문을 두드리는군. 그뿐, 그뿐이야.”


아, 또렷이 기억난다. 음울하던 12월의 그날, 
꺼져 가는 잿불 하나하나 마루에 그림자를 던지던 그날. 
나는 간절히 바랐다. 
아침이 오기를, 책으로 슬픔을 잊을 수 있기를, 
레노어를 잃어버린 그 슬픔을 모두 잊을 수 있기를 
헛되이 헛되이 바랐다.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 지은 찬란하게 빛난 그 소녀, 
그 이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네. 
자줏빛 커튼이 스치는 부드럽고 슬픈 소리에 나는 몸서리쳤다.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주위를 둘러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려 자리에서 일어나 되뇌었다. 
“누가 방문 앞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군. 
이 늦은 밤 누가 내 방문 앞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군. 
그뿐, 그뿐이야.” 


나는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고는 주저 않고 말했다.
“남자분인지 여자분인지 진정 용서를 빕니다.
가볍게 또 약하게 두드리는 이 문소리를
제가 설핏 잠이 들어 듣지 못했네요.” 
그리고 내가 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곳에는 어둠뿐, 그뿐이었다. 


그 짙은 어둠 속을 살피며 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놀라워하며, 두려워하며, 궁금해하며,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꿈을 꾸며. 
하지만 고요함은 깨지지 않고 그 어떤 징조도 없이 정적만 흘렀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내가 속삭인 한마디, “레노어!” 
오직 그뿐, 그뿐이었다. 


타 버릴 듯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왔을 때 
아까보다 더 크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분명 무언가 창문에 있구나.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인지 살펴봐야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슨 일인지 살펴봐야지. 
바람 소리뿐, 그뿐이야.”  
덧문을 활짝 열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성스럽던 그 옛날의 위풍당당한 까마귀가 들어왔다.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이 
마치 귀족이나 된 듯 우아한 몸짓으로 방문 위에 올라앉았다. 
방문 위에 걸어 둔 팔라스 흉상에 올라앉았다. 
그렇게 올라앉아 있을 뿐, 그뿐이었다.     


< 아테나 여신, 미네르바(지혜, 전쟁, 시, 의술, 상업, 기술, 음악의 신), 팔라스(별칭) >


이 흑단 같이 검은 새의 엄숙하고 점잖은 표정에 
나는 슬픈 공상을 잠시 잊고 미소를 지었다. 
“볏은 깎이고 닳았지만 너는 겁이 없구나.  
밤의 기슭에서 날아온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그 옛날의 까마귀여,
지옥 같은 밤의 기슭에서 부르던 너의 당당한 이름을 말해 다오!”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이런 새 따위가 이토록 분명히 말을 하다니.
뜻도 없고 맞지도 않는 대답이었으나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살아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누리지 못했다. 
방문 위에 올라앉은 새를 보는 축복을, 
방문 위 조각에 앉은 새든 짐승이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보는 축복을. 
“다시는 아니야.”     


까마귀는 조용한 흉상 위에 덩그러니 앉아 
마치 영혼이라도 담은 듯 그 말만 하고는 
입을 닫고, 깃털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친구들이 떠나갔듯이, 희망이 사라졌듯이,  
그도 내일이면 떠나가겠지.”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정적을 깨는 꼭 맞는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틀림없이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내뱉을 뿐이겠지. 
무자비한 재앙이 덮치고 덮쳐 온 불행한 주인이 
저 한마디를 노래한 거겠지. 
저 구슬픈 한마디로 희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거겠지. 
‘다시는, 다시는 아니야.’라고.”     



까마귀 덕분에 나는 슬픈 공상을 잠시 잊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곧장 새와 흉상과 문 앞으로 푹신한 의자를 끌어다 놓고 
벨벳 쿠션 위에 편안히 앉아 공상에 빠져들었다. 
그 옛날의 불길한 새가, 
차갑고, 볼품없고, 소름이 끼치고, 말라빠진, 그 옛날의 불길한 새가 
“다시는 아니야.”라고 우짖는 소리의 뜻을 찾아서.     


골똘히 공상에 잠겨, 새의 불타는 두 눈이 가슴을 파고들어도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불이 감미롭게 내리비치는 벨벳에 머리를 기댄 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등불이 감미롭게 내리비치는 이 자줏빛 벨벳에  
그녀는 기대지 못하리라, 아, 다시는 못하리라. 
그때 천사들이 촘촘한 마룻바닥 위로 발소리를 내며 들어와
보이지 않는 향로를 흔들며 향기로 공기를 채우는 듯했다. 
나는 소리쳤다.
“가련한 것! 신이 너에게, 이 천사들을 시켜 너에게 
레노어의 기억을 잊게 하는 약을 보냈구나!
마셔라! 아, 이 친절한 약을 마시고, 떠나 버린 레노어를 잊어라!”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예언자여! 악마의 짐승이여! 새든 악마든, 여전히 예언자로다! 
악마가 보냈든, 폭풍에 날려 왔든   
마법에 걸린 이 쓸쓸한 땅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이 집에서
고독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여, 나에게 말해 다오. 
길레아드에 향유가 정말 있는가? 
말해 다오. 이렇게 청하노니 말해 다오!”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예언자여! 악마의 짐승이여! 새든 악마든, 여전히 예언자로다! 
우리를 굽어보는 하늘에 대고, 우리가 받드는 신의 이름을 걸고, 
슬픔으로 가득한 이 영혼에게 말해 다오.  
아득한 천국에 가면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 지은 거룩한 소녀를 안을 수 있다고,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 지은  
찬란하게 빛나는 소녀를 안을 수 있다고.”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새든 악마든, 그 말을 작별 인사라 치자! 
폭풍 속으로, 지옥 같은 밤의 기슭으로 돌아가라! 
네 영혼이 내뱉은 거짓말의 표시, 검은 깃털 하나 남기지 마라! 
내 고독을 깨지 말고 떠나라! 내 방문 위 흉상에서 내려오라! 
내 심장에 박힌 네 부리도 빼내어 문밖으로 썩 사라져라!” 
까마귀가 말했다. 
“다시는 아니야.”     


까마귀는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그대로, 
내 방문 위 창백한 팔라스 흉상에 앉아 있다. 
그의 눈은 꿈꾸는 악마의 모습 그 자체이며 
등불은 그의 등을 타고 흘러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내 영혼은 바닥을 뒤덮은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다시는 못하리라!

- 더클래식, 에드거 앨런포 단편선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