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호에 대한 일반론이 있어요. 즉 '해독할 수 없는 암호는 없다.'라는 것인데. 물론 옳은 말이야. 왜냐하면, 암호란 것은 어떤 유의 원칙에 따라 성립된 것이지 때문이지. 원칙이란 그게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하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공통항 같은 것이에요. 따라서 그 원칙을 이해할 수 있으면 암호도 풀 수 있지. 암호 중에서 가장 신뢰성이 높은 것이 북 투 북 - 암호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이 동일한 판본의 책을 지니고 그 페이지 수와 행으로 단어를 정하는 시스템 - 인데. 이 방법도 책이 발견되어 버리면 끝이지. 게다가 늘 그 책을 가까이에 두어야 하니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완벽한 암호는 딱 한가지밖에 없다고 말이야. 바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스크램블하는 것. 다시 말해서 완벽한 블랙박스를 통해 정보를 스크램블하고, 그걸 처리해서 다시 똑같은 블랙박스를 통해 역스크램블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블랙박스의 내용과 원리를 본인조차 모르게 하는 것.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게 한다는 말이에요. 본인도 모르는데, 타인이 힘으로 그 정보를 빼낼 수는 없지. 어때요, 완벽하지 않은가?"
"폐관 시간인 6시가 다가오자 도서관 현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대부분이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고등학생인 듯했다. 그들은 대개 나처럼 비닐 스포츠 백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고등학생이란 모두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존재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모두 어딘가가 지나치게 확대되었든가, 무언가가 부족하다. 하기야 그들 눈에는 내가 훨씬 더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대 차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본인은 감지하지 못하는 핵 같은 게 있어. 내 경우는 그게 한 마을이야. 그 마을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주위는 높은 벽돌담이 둘러싸고 있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벽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있는 건 일각수뿐이지. 일각수는 사람들의 자아와 에고를 기름종이처럼 빨아들여서 마을 밖으로 옮겨 가. 그래서 마을에는 자아도 에고도 없어. 나는 그런 마을에 살고 있어. - 그런 내용이야. 실제로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라서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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