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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전자책
이분 대단하시네. 종이책 한 권 사야겠다.
문서 편집 소프트웨어에는 기울어진 [가] 버튼이 있다. 폰트에 이탤릭체가 있으면 해당하는 이탤릭체를 불러오지만, 한글 폰트들처럼 이탤릭체가 없는 경우에는 기계적으로 12도를 기울인다. 그래서 ‘가짜 이탤릭체’라고도 부르고, ‘기울어진 글자’라는 뜻으로 ‘사체(斜體)’라고도 부른다. 마치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사진을 필터로 기울이기만 해 놓고 달리는 모습으로 봐달라는 상황이나 다름없기에, 그 세심함이 아쉽다.
소프트웨어에서 볼드[B] 버튼을 누를 때, 그 폰트에 볼드체가 있으면 해당 볼드체를 불러오지만, 없으면 기계적인 방식으로 레귤러체를 두껍게 한 겹 입힌다. 이것을 ‘가짜 볼드체’라고 한다. 제대로 디자인된 진짜 볼드체는 둔중하게 겨울옷을 껴입은 모습이 아니라 글래머러스한 모습에 가깝다. 볼드체는 울트라 볼드(ultra bold)를 지나 파생 방식에 따라 각각 블랙(black), 팻(fat), 헤비(heavy) 등으로 점점 더 무거워진다.
글자에는 ‘가시성’ · ‘판독성’ · ‘가독성’이라는 기능이 있다. ‘가시성’은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힘이다. 간판이나 제목의 특정 단어나 문장에 사용된 글자체가 예쁘거나 독특하면 가시성이 높다. ‘판독성’은 글자들이 서로 잘 판별되는가를 가른다. 가령 ‘흥’과 ‘홍’이 혼란을 일으키면 판독성은 떨어진다. 한편, 긴 글을 읽을 때 인체에 피로감을 덜 주는 글자체에 대해 ‘가독성’이 높다고 한다. 300쪽 분량의 책에서 ‘흥’과 ‘홍’ 정도쯤 뚜렷이 구분이 되지 않더라도 줄줄 읽어 나가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이름이 ‘홍흥’씨와 ‘흥홍’씨 정도 되는 특수한 상황이라면 판독성이 가독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말이다.
‘가독성’을 확보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노련한 경험뿐 아니라 글자와 상호작용하는 인체와 기술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공학 · 인지심리학 · 컴퓨터공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와 협업이 요구된다.
스케일이 바뀌어도 우리는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균등한 비율로 커지거나 작아지고 모든 디테일이 그대로이리라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폰트를 선택하는 과정은 텍스트의 맥락과 기술적 환경,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을 항으로 삼아 방정식을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을 잘 파악해서 식을 세울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폰트 디자인은 ‘눈을 위한 말투’다.
글자 = 글씨 + 활자(폰트)
글자체(글자의 모양) = 글씨체(글씨의 모양) + 활자체(폰트의 모양)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 역법 체계인 칠정산,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소리의 지속 시간을 양(量)으로 표기한 정량악보인 정간보 등이 내 통치하에 발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연속적인 시간의 개념을 단위로 분절해서 눈에 보이는 공간에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훈련을 평생에 걸쳐서 한 셈입니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이 모든 업적들을 집대성한 과업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의 발명 역시 시간과 청각 영역의 한국어 소리들을 분석해서, 음성 언어를 공간과 시각 영역의 문자 체계로 ‘번역’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언어학을 잘 알고 있었고, 집현전의 학자들은 당대에 접근 가능한 사방의 언어와 문자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학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 종합적인 성취였습니다. 나는 음절 문자인 한자를 초성과 중성과 종성의 음소 단위로 쪼개었습니다. ‘글’이라는 단어에서 ‘글’은 음절이고, 한 음절은 초성 ‘ㄱ’, 중성 ‘ㅡ’, 종성 ‘ㄹ’의 세 음소로 나뉩니다. 이것을 ‘음절삼분법’이라고 합니다. 서구의 로마자는 음소들을 ‘ㄱㅡㄹ’처럼 일렬 배열합니다. 중국의 한자와 일본의 가나 문자는 음절 ‘글’을 음소 단위로 쪼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로마자처럼 음소 단위로 쪼갠 한글을 다시 동아시아 문자들처럼 음절 단위로 모아 쓰도록 했습니다. 한글은 모아쓰기를 함으로써 로마자 같은 음소 문자와 한자 같은 음절 문자의 성격을 모두 가집니다. 한글 모아쓰기는 타자기 이후 컴퓨터와 모바일 환경에서 한글 입력 방식을 개발하는 데에 큰 난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음소들이 로마자처럼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의 2차원 두 방향으로 교차해서 진행해 가니까요. 그렇다고 풀어쓸 수도 없습니다. ‘ㄱㅡㄹ’이 ‘글’보다 그대들에게 불편한 것은 익숙함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음절이 대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지각되는 한국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한국어의 이런 특성에 꼭 맞추어 한글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음소의 개념을 발견해내고도 굳이 모아쓰기를 해서 음절문자로 돌아간 것은 한자의 영향이라거나 언어학적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한글을 발명한 15세기 전통사회 조선에서는 2차원 정사각형을 공간의 기본 단위로 인식했습니다. 이런 공간 관념으로부터 조선의 토지와 마을, 도시와 가옥, 그리고 일상의 여러 공간들이 사각형 단위로 구획되었습니다. 한글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발명된 글자입니다.
장난치듯 이것 저것 해보는 잉여 행동이 당장에는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훗날 뜻밖의 위기를 헤쳐 나갈 경험적 자산으로 몸과 뇌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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