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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전자책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바다 한가운데 가장 얕은 바다 쪽을 찾아보면서도
나는 실족할까 겁내어 떨고,
해변에 다가서야 안심한다.
너를 찬양하는 나의 노래가 서툴러
너를 욕되게 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를 사모하는 나의 노래를 듣고 놀라워하고,
너를 알고 싶어 안절부절 너의 이름을 알고자 애쓴다.
너의 거룩한 이름을 찾아내려 오리무중으로 헤맨다.
눈부셔 그런 게 분명한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래서 너를 찾지 못하는 이 딱한 민중들은
한 가지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너를 보지 못한다.
한 가지 방법이란 비교해보고서야 골라내는 방법이다.
완전한 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을 골라내고서는
소리 낼 줄 아는 자는 용감하게 소리친다 ; 드디어 찾았다!
반공주의는 독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다.
이 원칙은 무단히 골라 실은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 25년간의 경험이 그와 같이 단호한 구호를 반복하게 한다. 이 구호는 우리가 공산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다. 반나치운동에서 단결력을 얻고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운 기독교인들이 물론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장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산주의 철학에, 그들의 실천적 도덕률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반공주의를 내거는 사람들의 의도와 그들이 숨기는 목표가 무엇인지 아는 까닭에 정치적 반공주의에 완강히 반대한다. 질서를 강조할 때 조심해야 한다. 진실이 동행하지 않는 질서(ordre)는 큰 무질서를 초래한다.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질서란 애매한 개념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다양한 질서들—바르소바에서 시행되는 질서, 혼잡을 감추기 위한 질서, 정의를 반대하기 위한 질서, 인정과 양심이 추구하는 격이 다른 질서(즉 사랑이 통치하는 질서), 인간을 부인하는 질서(증오심을 동원하는 피의 질서). 사회질서란 교통질서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1944년 8월의 파리 시가전, 총격과 화염 속에 일그러진 얼굴의 파리 시민들. 봉기의 혼란 속에도 질서의 원칙은 있었다. 나치 점령에서 파리 탈환을 위한 질서. 이 혁명이 중단될 경우, 그 의지가 사산될 경우, 맥 빠진 무질서의 긴 세월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단합된 정부가 질서의 보장인가? 나치 정권의 단합된 정부가 독일 국민에게 진실한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가? 개인에 관한 질서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개인의 생애 중 어떤 경우에 그가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그의 처신을 일치시켜 균형 잡힌 생을 화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격정의 무질서 속에서 그가 택한 사상에 일치한 행동을 하느라 죽음을 감수하는 반란자는 스스로 세운 분명한 원칙에 적절한 처신을 하는 고로, 실은 질서의 인간이다. 반면, 일생 동안 매일 세 끼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재산을 안전한 곳에 투자하며, 길이 소란스러우면 집으로 얼른 돌아가는 걱정 없는 팔자의 사람을 질서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겁쟁이요, 재산 관리를 잘하는 위인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질서가 두려움 때문에 신중하고, 재산 모으기에만 정신이 팔려 타인에 대해 무심한 사람들의 질서라면, 그것은 최악의 무질서다. 무관심은 모든 불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균형과 화합, 즉 평등과 우애가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사회적 질서란 통치 세력과 피통치 세력(시민) 사이에 균형관계가 성립되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관계의 성립은 보다 고차원의 원칙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민중의 이상적 질서는 정부와 시민 사이에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사회다. –1944년 10월 12일 질서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현실의 권력층은 항상 그들 세력의 욕구를 강요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질서를 주장한다. 문제의 앞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1944.10.12 -
< Étienne de La Boétie, 1530 ~ 1563,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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