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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

왜 고전을 읽는가 - 이탈로 칼비노

by 충청도 자손박 2017. 9. 21.

혹여 누군가가 고전을 구태여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시오랑의 다음 글을 인용할 것이다.(시오랑의 저서는 아직 고전은 아니지만 현재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유일한 동시대 철학자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만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더 단순하게는 언어나 관습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이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12. 고전이란,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13. 고전이란,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잡음)으로 물러나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이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대한 글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 1923 ~ 1985, 쿠바, 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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