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몸이 인격을 담지 않은 그릇 내지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독촉이다. 생존을 위한 모든 인식은 몸에 남겨주되,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만은 탈탈 털어서 건조시켜버려야 한다는 윽박이다.
- 지금 그거요. 왜 가끔 저한테 그런식으로 합쇼하세요.
- 지금 네가 어리고 환경상 어쩔 수 없이 내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내가 너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가끔. 너 굼벵이같이 하는 거 보고 내가 혹시 뚜껑이라도 열러서 치상이나 치사가 되어버리면 곤란하잖아. 하산하면 너는 나와 같은 업자니까 그럴일 없고.
그의 말이 공이가 되어 뇌관을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끝내 통곡하고 만다. 몸 안에서 이제 막 펼쳐진 깃발이 구조 요청이나 항복 선언처럼 나부낀다. 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아나갈 손, 자르고 찌르고 태워버릴 불모의 손, 과녁 아닌 생명을 쏘고 나서야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 높은 확률로 예정된 자기 침몰의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낸 손이라는 총체적 아이러니가 콧속을 시큰하게 찔어오다 뒤흔든다.
평생 손끝과 머리맡을 떠나지 않을 시취에 비하면 그나마 덜 직접적이고 비구체적이며 이름 붙이기엔 어려운 지금의 불가해한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삶의 지표면 아래서 내내 여진으로 맴돌아, 그것이 비록 산사태를 일으키거나 교각을 꺾지는 못할 테지만, 최소한 마지막 숨을 쉴 때 찾아오는 완전한 적만 안에서 자신의 탄착점을 찾으리라는 것을.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문학상 작품집 - 2023, 46회 (0) | 2023.09.07 |
---|---|
행성어 서점 - 김초엽 (0) | 2023.03.27 |
니니코라치우푼타 (0) | 2023.03.06 |
진동새와 손편지 - 김초엽 (0) | 2022.12.06 |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0) | 2022.05.07 |
작별인사 - 김영하 (0) | 2022.05.06 |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 장강명 (0) | 2022.03.06 |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 최정화 (0) | 2022.01.11 |
빅 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0) | 2021.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