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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 정용준

by 충청도 자손박 2018. 11. 21.
유령
국내도서
저자 : 정용준
출판 : 현대문학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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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종이책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수의 운명을 갖고 겨울에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사냥을 잘했던 이 남자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였습니다. 무엇인가를 사로잡아 생명을 빼앗는 일. 좋아하거나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그걸 잘했고 나중엔 그게 일이 되었죠. 그는 뛰어난 사냥꾼입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지요. 그가 죽인 이들은 기록에 남지 않습니다. 미제이거나 사고로 존재할 뿐이죠. 그가 무엇인가를 노리고 응시하면 무엇이든 쓰러지고 맙니다. 그의 눈은 정확하고 창끝은 날카롭거든요.

해경은 차갑게 식은 홍삼 봉지의 끝을 이빨로 뜯었다. 동생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사수의 마지막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랑했던 제자 중 한 명이 히드라의 뱀독이 묻은 화살을 날렸는데 그게 하필 사수의 허벅지에 맞았다. 실수였지만 대부분의 실수가 그렇듯 돌이킬수 없었다. 사수는 죽지 않는 몸을 갖고 있었기에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고 몸에 남게 된다. 생명을 앗아가는 고통을 품은 불사의 몸, 그는 영원한 고통을 참다못해 자신의 죽지 않는 본성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다. 해경은 내용물을 마셨다. 검고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해경은 궁금했다. 사수는 죽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고통이 멈춰 행복했을까, 아니면 죽음이 찾아왔기에 고통스러웠을까. 해경은 잠시 입을 막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이름 모를 새 한마리. 그 화살은 혹시 내가 쏜 것은 아닐까? 겨울이 끝나가는구나 손이 저린다. 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안아주고 싶어서. 이게 통증이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