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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종이책
그들이 한문 고전의 밑바닥을 훑고 있었던 것은 배워야 할 신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것을 오래된 지식의 바탕 위에서 이해 해야 할 정신 상태도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자. 이 근면한 학자들이 열의 전달과 관련하여 '복사輻射'라는 말을 만들면서, 그 말에 해당하는 서양어 radiation이 '수레바퀴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us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수레바퀴 살輻' 자를 한문 고전에서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식의 새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패러다임과 만나고, 오래된 세상의 사람이 새 지식과 만날 수 있는 접합점을 만들기에 그들이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말해준다. (...) 고유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다른 외래어는 우리말 속에서 갖는 언어학적 가치가 다르다. '시인'의 '시'는 시정, 시집, 시심, 시문학, 서정시, 서사시와 연결되고, '시작'의 '시'는 시동, 시말, 시원, 시조, 시종, 시초, 개시와 연결되어 그물망을 형성하지만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시'는 우리말에서 무엇인가. '능기'나 '기표'와 달리 '시니피앙'은 우리말 속에서 고립될 수 밖에 없으며, 고립된 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한 언어 체계 전체에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물망과 연결 고리를 갖는 낱말은 그 자체를 설명하는 힘도 그 그물망에서 얻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물망을 풍요롭게도 한다. 한 낱말은 항상 다른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낸다. (순우리말 학술 용어 다듬기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한자어만큼 강한 그물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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