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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부탁 - 황현산

by 충청도 자손박 2018. 7. 23.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국내도서
저자 : 황현산
출판 : 난다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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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종이책

그들이 한문 고전의 밑바닥을 훑고 있었던 것은 배워야 할 신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것을 오래된 지식의 바탕 위에서 이해 해야 할 정신 상태도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자. 이 근면한 학자들이 열의 전달과 관련하여 '복사輻射'라는 말을 만들면서, 그 말에 해당하는 서양어 radiation이 '수레바퀴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us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수레바퀴 살輻' 자를 한문 고전에서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식의 새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패러다임과 만나고, 오래된 세상의 사람이 새 지식과 만날 수 있는 접합점을 만들기에 그들이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말해준다. (...) 고유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다른 외래어는 우리말 속에서 갖는 언어학적 가치가 다르다. '시인'의 '시'는 시정, 시집, 시심, 시문학, 서정시, 서사시와 연결되고, '시작'의 '시'는 시동, 시말, 시원, 시조, 시종, 시초, 개시와 연결되어 그물망을 형성하지만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시'는 우리말에서 무엇인가. '능기'나 '기표'와 달리 '시니피앙'은 우리말 속에서 고립될 수 밖에 없으며, 고립된 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한 언어 체계 전체에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물망과 연결 고리를 갖는 낱말은 그 자체를 설명하는 힘도 그 그물망에서 얻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물망을 풍요롭게도 한다. 한 낱말은 항상 다른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낸다. (순우리말 학술 용어 다듬기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한자어만큼 강한 그물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정염情炎의 세계에서는, 정염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그 정염입니다. 정염은 욕망에 소망을 붙여놓지요. 욕망하는 한은 행복함이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행복이 전혀 찾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연장됩니다. 공상의 매력은 그 원인이 된 정염만큼 깊어지지요. 따라서 이 상태는 스스로 충족되며, 거기서 비롯한 불안은 현실을 보충하는 쾌락의 일종으로 어쩌면 현실보다 더 낫지요. 더이상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는자 불행하구나!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자신이 지닌 것을 모두 잃지요. 인간은 자기가 얻은 것보다 희망하는 것으로 더 즐거워하며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합니다. 사실 인간은, 갈구하나 유한하며, 모든 것을 원하나 얻는 것은 적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어떤 위로의 힘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그 힘은 그가 욕망하는 모든 것 가까이 그를 데려가고, 어떤 점에서는 욕망하는 것을 그에게 안겨주고, 그를 그의 상상력에 복종시키고, 그에게 욕망하는 것을 대령해 감각할 수 있게 하고, 그를 그의 정염에 따라 변화시키지요. 그러나 이 모든 마력은 그 대상 자제 앞에서 사라집니다. 이 대상을 그 소유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누구도 자기가 보는 것을 머릿속에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향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상은 사라지니까요. 망상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깃들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인간적인 것들의 허무가 이와 같아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 누엘 벨로이즈, 루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