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눌변 - 김찬호

by 충청도 자손박 2016. 11. 20.
눌변
국내도서
저자 : 김찬호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6.06.24
상세보기


에세이, 종이책


'관계의 회복'이 배면에 깔린 여러 글들을 보며 얼마 전 접했던 버트런드 러셀의 사회주의적 시각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문어체이고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는데도, 옆집 아저씨하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듯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눌변
더듬거리는 서툰 말솜씨

문학은 눌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달변은 믿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저들의 체계이자 함정이므로, 문학은 더듬거리며 허우적거리며 자기 말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지. 마치 모든 것을 처음으로 말하듯이 그토록 어렵게. 눌변이란 침묵이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침묵할 수 없는 자들의, 서투름이라고나 할까. 더듬거리는 꼴에도 결국 삶을 사랑하므로 침묵으로 초월하지 못한 자가, 또는 그런 초월을 거부한 자가 침묵한듯 말하는 방식. 덧붙여, 이 모순을 끝끝내 밀고 나가는 방식. 고쳐지지 않는 서투름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실패하겠지만, 그렇지만...
- 이인성 -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흙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순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 거룩한 식사 -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방문객 -


기억은 단지 지난 경험들에 대한 딱딱한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울림으로 현재에 되살아난다. 마치 자동차의 핸들을 돌리면 백미러에 비치는 풍경이 달라지듯, 삶과 세상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를 바꾸면 과거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과거는 불변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기억이고,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것은 곧 현재의 나 또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마을은 사라지고 있는가?
왜 무당과 신들은 도망치고 있는가?
왜 비와 바람이 빈집을 때리고 있는가?

까치나 강아지나 바라보며
담배나 빨고 노래나 부르고
늙으면 죽어야지
농반 진반 너스레 떨며
손주 걱정 돼지 걱정으로 소일해야 할
할매와 할아범들이

왜 쇠사슬에 몸을 묶는가?
왜 죽기 살기로 싸우는가?
- 심보선, 왜? -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지만, 사회적 관행을 너무 신뢰한다.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되는데도 이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생활의 구조나 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관념이나 습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떠도는 정보들을 입맛대로 선택하고 편집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허구를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결과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의관을 갖춘 자들이 모인 자리에는 오직 대청에 가득한 웃을소리만 들릴 뿐이고, 정사 다루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이익만 도모할 뿐이며, 실제로 나라를 걱정하고 공적인 일을 받드는 사람은 적다. 관직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관청 보기를 주막집처럼 여긴다. 재상은 중용이나 지키는 것을 어질다 내세우고, 삼사는 말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다고 하며, 지방관들은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바보라고 생각한다. 점점 이런 상태로 가다가, 결국에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이중환, 택리지 -


무사안일, 복지부동, 직무 유기, 기강 해이, 근무 태만, 탁상공론, 상명 하달, 구태의연, 자리보전, 과잉 충성, 묵묵부답, 면피 행정, 전시 행정, 성과주의, 전관예우, 권위주의, 관존민비, 늑장 대응, 몸 사리기, 제 식구 감싸기, 부처 이기주의, 철밥통, 무책임, 졸속, 무능, 부패, 비리, 비효율, 보신, 뒷북, 혼선, 엇박자, 눈치, 남 탓, 발뺌, 변명, 생색, 무마, 묵살, 엉터리 통계, 진상 은폐, 말 바꾸기, 떠넘기기, 나눠 먹기, 관피아, 줄서기, 낙하산, 담합, 방만, 유착, 결탁, 은폐, 외압, 적폐...


< 사회학자 김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