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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 프란츠 카프카

by 충청도 자손박 2017. 3. 10.
프란츠 카프카 - 꿈
국내도서
저자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 배수아역
출판 : 워크룸프레스(WORKROOM) 20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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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꿈과 관련해 쓴 편린들(일기, 서한 등) , 종이책

꿈과 같은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운명이자 의미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변적인 사건이 되었다.

다양한 특징을 갖는 그의 텍스트들은 세 종류로 분류가 가능하다(그렇긴 하다만 그들 각각을 구분하는 경계는 유동적이다). 실제로 꾼 꿈을 그대로 기록한 것(기록하는 단계에서 어느 정도의 문학적 가공이 행해지기도 한다), 문학 텍스트로의 전이를 염두에 두고 몽환으로 그려본 내용(통제된 꿈), 그리고 처음부터 문학작품 속에서 꿈같은 효과를 불어일으키는 소재로 삼으려고 작정한 예술적 시나리오.


요제프 K는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K는 산책을 나섰다. 그러나 두걸음을 채 내딛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묘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묘지의 길들은 매우 인공적인 모양으로 걷기 불편할 정도로 구불구불 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을 마치 물살에 실린 듯 매끄럽게, 공중에 살짝 부유한 채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미끄러져 갔다. 그는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갓 만들어진 어느 봉분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멈추어 설 생각을 했다. 그 무덤은 그를 강하게 유혹했으므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도저히 속도가 양에 차지 않았다. 간혹 무덤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곤 했다. 여러 개의 깃발들이 펄럭이면서 서로 힘차게 겹치는 바람에 무덤의 모습이 가렸던 것이다. 기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축하하는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여전히 먼 곳으로 향하고 달려가던 중에, 갑자기 그는 똑같은 무덤이 바로 옆 길가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그 무덤을 지나쳐 버렸으므로 그는 서둘러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뛰어내리는 와중에도 길은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하고 있으므로, 그는 비틀거리다가 무덤 앞으로 무릎을 꿇은 채 쓰러져버렸다. 무덤 뒤에는 두 명의 남자가 양손으로 비석을 함께 치켜든 자세오 서있었다. K가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비석을 바닥에 쿵 내려놓았고, 비석은 담처럼 단단하게 땅에 박혔다.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제3의 남자가 나타났는데, K는 화가인 그를 알아보았다. 화가는 단추를 엉성하게 잠근 셔츠에 바지차림이었다. 머리에는 테 없는 벨벳 모자를 썼다. 한 손에는 평범한 연필을 들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그는 허공에 연필로 인물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화가는 그 연필로 비석 위에 작업을 하려고 했다. 비석은 매우 높았으므로 화가는 쪼그리고 앉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허리를 살짝 굽히기는 했다. 무덤이 그와 비석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데 그는 무덤 위로 올라서지는 않으려 했다. 화가는 발끝으로 서서, 비석의 표면에 왼손을 받쳤다. 특별히 능숙한 솜씨 덕분에, 화가는 평범한 연필을 가지고 황금색 필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썼다. '여기 잠들다-.' 모든 활자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돌 속으로 깊이 파였고 완벽한 황금빛이었다. 두 단어를 쓴 후 그는 K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비석에 적힐 글귀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K는, 화가가 무엇을 망설이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직 비석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는 다시 계속해서 비문을 적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종의 장애가 생긴 것이다. 화가는 연필을 쥔 손을 아래로 떨구고, 다시 K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K도 그를 보았다. 그래서 그가 매우 심각하게 당황해하고 있으며,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마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까지 화가가 갖고 있던 모든 활기와 생명력은 사라져버렸다. 그 덕분에 K 역시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모르며 서로 바라만 보았다.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흉측한 오해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 좋지 않은 순간, 묘지 종탑에서 조그만 종이 댕댕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가가 한 손을 치켜들고 흔들자, 종소리는 멈추었다. 잠시 후 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작게, 그 어떤 재촉의 기운도 없이 울렸다가 금세 중단되었다. 마치 종이 스스로의 소리를 한번 시험해보려고 한 듯이. K는 화가의 상태에 대해 너무도 낙담한 나머지 울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랫동안 훌쩍거렸다. 화가는 K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곧 자신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는, 계속해서 비석에 글자를 새기기로 결심했다. 화가가 다음 철자 최초의 획을 조그맣게 긋기 시작할 때, 그것은 K에게는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화가는 K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억지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글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고, 더구나 황금빛도 아니었다. 창백하고 멀건 획이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지나갔다. 단지 철자의 크기만은 무척 컸다. 그것은 알파벳 J였다. 철자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화가는 솟아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덤으로 성큼 뛰어올라가 발로 흙을 쿵쿵 밟아댔다. 봉분 흙이 주변으로 튀었다. 그제야 K는 화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화가에게 용서를 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K는 열 손가락으로 흙을 마구 파헤쳤다. 흙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무덤은 이미 이 일을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단지 눈속임으로 지표면에 딱딱한 흙을 살짝 덮어놓았을 뿐이었다. 표면의 흙을 걷어내자마자 경사진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던 것이다. K는 가볍게 빙그르르 몸을 돌리고, 등을 아래로 한 채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아직 머리를 목덜미 위에 둔 K가 칠흑 같은 심연을 향해 한없이 아래로 빨려드는 동안, 위에서는 그의 이름이 강렬한 장식체로 비석 위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 순간 황홀함에 떨며 그가 잠이 깨었다.
- 꿈 -